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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경체] 조선 대표 재상 퇴계 이황의 특별한 '재테크'는?
- 작성일
- 25.03.27
[EBS 뉴스]
서현아 앵커
경제 전문가들과 함께하는 '청소년 경제 체력 키우기 - 청경체 프로젝트' 시간입니다.
오늘은 역사 속 인물들의 경제 활동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지혜를 알아볼 텐데요.
조선 후기 대표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이 제테크에서도 고수였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퇴계 선생을 통해 들여다보는 조선시대 양반의 재테크 비법과 현대 사회의 시사점,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과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작가님 어서오세요.
역사 교과서나 드라마에서 접한 조선시대의 모습은 보통 양반은 공부하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역사 속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부를 추구하는 모습, 잘 상상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인데, 실제로는 어땠습니까?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옛날 사람들도 돈을 벌려고 애썼다라고 말한다면 금방 와닿지는 않으실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옛날 양반들은 아예 돈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돈을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본주의나 상업이 발달하지 않고 사회발전이 늦어졌다고요.
이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또 아주 맞는 말도 아닙니다.
언제 어느 때든 사람들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입에 풀칠하고 밥 겨우 먹고 아무 옷이나 입고 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그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게 됩니다.
이왕이면 맛있는 것 먹고, 멋진 옷도 입고, 귀한 물건도 가지고 싶고, 그리고 이걸 남들에게 자랑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풍족함, 그러니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도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서현아 앵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주로 어떻게 돈을 벌었나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요즘 사람들의 꿈, 경제적인 목표가 마이홈, 그러니까 나의 집을 가지는 것이라면 옛날 사람들은 내 땅을 가지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냥 땅이 아니라 농사를 지을 농토였지요.
조선시대의 생업은 자기 농토에서, 아니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을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땅이 비옥하거나 물이 잘 통하는 곳이라면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도 가진 땅이 넓으면 수익이 당연히 더 늘어났고요.
그런데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다면 나라에 세금도 내야 하고, 땅 주인에게 소작료도 내야 했기에 많은 이익을 얻기 어려웠지요.
그래서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내 땅 마련의 꿈을 이룩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서현아 앵커
하지만 단순히 농사만으로는 부를 축적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양반들은 어떻게 더 많은 재산을 모았을까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농부 한 명이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지어봐야 부자가 되기는 어려웠습니다.
가족들이 굶지 않는 정도가 최선이었겠지요.
하지만 양반들은 상황이 좀 달랐습니다.
이들은 조상들에게 물려받거나 나라에게 하사받아 넓은 농토를 가질 수 있었거든요.
그러면 노비들을 시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땅을 빌려줘서 크게 농사를 지어서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양반들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도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리가 되거나, 아니면 결혼을 하고 재산 관리를 열심히 하면 말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퇴계 이황입니다.
이분은 원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과거 시험에 합격했고 결혼을 할 때 부인이 재산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1,500평의 넓은 농토와 100여 명의 노비들이었지요.
노비들이 재산이라니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옛날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가난하던 퇴계 이황은 갑자기 재산이 늘어났는데, 그걸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노비들을 잘 부리고 농사를 지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열심히 경영을 해야 했습니다.
서현아 앵커
조선을 대표하는 재상인 퇴계 이황도 농사를 경영해야 했다고 하셨는데,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겠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운영했나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정말로 가난한 양반들이나 사정이 있으면 양반들은 직접 농사에 참여하긴 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론 노비가 씨 뿌리고 거두는 농사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리고 양반들은 이것을 감독했지요.
원래 퇴계 이황은 평생 공부만 하고 살았을 것 같은 인상이 있습니다만, 정작 그 분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농사일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밭에 씨 뿌렸니? 잡초는 뽑았니? 익은 곡식은 거두었니? 수확량이 얼마나 되니?"그러니까 양반이 직접 농사만 안 지었다 뿐이지, 농사의 모든 과정을 알고 지휘했다는 뜻입니다.
이 때 이황은 한양에 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대신 시킨 것입니다만, 반대로 이황이 안동에 있었다면 전부 본인이 했겠지요.
이런 농사일 관리는 양반에게 몹시 중요했습니다.
아들이 한양으로 오려고 하자 이황은 "네가 없으면 누가 농사짓냐?"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농민이나 노비들이 일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기획하고 관리를 해야 했던 겁니다.
때 맞춰 씨앗 준비하고 일할 사람들 모으는 등등 그래야지 농사도 잘 되고 살림도 잘 꾸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돈을 잘 벌 수 있었지요.
그냥 곡식 뿐만 아니라 목화나 담배같은 비싸게 팔리는 농작물을 심기도 했는데, 이걸 남이 훔쳐가지 않게 잘 지켰고, 수확을 한 다음에는 시장에 가져가서 팔았습니다.
비록 노비들이 대신했다곤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돈을 가볍게 보지도 않았습니다.
서현아 앵커
퇴계 이황이 재산을 관리하면서 특히 신경 썼던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우선 성실함이 있겠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성실이 중요하지만 농사는 특히 그렇거든요.
게다가 이황은 유명한 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성리학 토론도 벌이고, 도산서원도 운영하고 제자들도 가르치고 참 바쁘게 살았거든요.
그런데도 이처럼 농사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계획된 소비입니다.
퇴계 이황이 가진 땅은 3만 평 정도였다고 하고 노비도 300명 가까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황은 겨울용 가죽옷을 20년 동안 아껴 입었고, 옷이 망가지자 손자를 시켜서 시세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돈이 있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계획적으로 썼다는 것이지요.
덧붙여 합리적인 경영도 있습니다.
이황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노비들 중에 누가 일을 잘하고 못하는 지를 일러뒀습니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일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는 철저한 세금납부가 있겠습니다.
퇴계 이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날짜 맞춰 세금 꼭 내라"라고 당부한 글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모로 존경할만한 사람입니다.
서현아 앵커
결국 퇴계 이황도 경제 관념이 매우 철저했던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
가장 경제적인 조선인이라고 하면 역시 퇴계 이황이 아닐까요.
경제 관념도 투철하고, 재산 관리도 잘하고, 원래 가졌던 재산을 성실하게 관리했습니다.
사실 재산은 쓰면 쓸수록 줄지 늘어나진 않는 것인데, 더 많이 늘어나게 한 이황의 재산관리는 굉장했지요.
또 이황은 이 재산으로 도산서원을 건립하고 제자들을 키워내어 영남의 학풍이 발전해서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퇴계 이황을 성리학을 발전시킨 인물로만 기억하는데, 이토록 경제 관념이 투철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지폐에 들어갈 만한 인물을 정말 잘 골랐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퇴계 이황 본인은 "나는 살림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하시기엔 너무 잘 하셔서 몹시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서현아 앵커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로만 알려졌던 퇴계 이황이 자신만의 학문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이면엔 철저한 경제 감각이 있었다는 점, 대단히 흥미로운데요.
또 그 안에 성실한 운영, 절제된 소비, 그리고 사람을 아는 경영의 힘 같은 경제의 기초가 있었다는 점 역시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큰 것 같습니다.
작가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